“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9절)
경건은 한 마디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신의 정신적인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경건이 유통되는 것이 문제이다. 가짜지만 감히 가짜라고 할 수 없는 높은 가치가 있다. 그것이 인간의 진선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아니 게임이 안 된다. 욥의 의를 그 누가 함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가차 없다. 땅에서 난 인간의 혼적인 의지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지로 형성되어 있는 어떤 종교적인 틀에다 갖다 붙이는 어린 경건의 방법을 속히 포기해야 한다.
예컨대 음식 중에 먹을 수 있는 것, 없는 것 또는 날짜에 대해 따로 구분하는 일, 특별한 장소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나아가서 몸을 낮춰 겸손하려는 노력, 말을 매끄럽게 하려는 혀 운동, 사람의 칭찬의 기준에 맞추려는 외식 등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받는 일이다. 사실 진리 안에 있는 성령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벌거벗기신다. 성령이 하시는 일 중에 가장 먼저가 ‘내부수리’인데 그 전보다 누추함이 휠씬 더 많이 드러난다. 정말 어떤 분의 말마따나 ‘공사 중 통행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안내판을 붙여야 할 지경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빚을 지게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제대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어둠에 있을 때 보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서 빛 가운데서 잘 하려고 노력한 중에서 하나님을 더 많이 애태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했다는 사실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의 지식으로 수 없이 빈총을 쏴서 남을 사살한 자신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이 아주 몹쓸 고깃덩어리임을 알게 된다. 그 때부터 자신을 미워하며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그 분만 긍정하게 된다. 기독교는 말씀에 의한 성례전이 그 복음의 진수이다. 말씀을 따라 세례와 성찬의 과정을 답습하므로 점점 새롭게 되고 자란다.
그것이 바로 머리를 붙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시고 은혜로 믿음을 주신 다음 그 믿는 것만큼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빠진 복음은 온전한 복음이 아니다. 아무리 ‘잘 믿는다. 열심이다. 착하다. 겸손하다. 친절하다’해도 자기 부정이 없는 복음은 결국 땅의 것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머리카락만 것이라도 우리의 것은 뽑아 내신다. 그 분은 땅의 것을 절대로 받지 않으신다.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받으시고 그것을 다시 주셔서 우리로 영원히 소유하게 하신다. 마음의 애씀으로 자신을 꾸미려고 하는 습관에서 벗어나 자신을 포기하고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만 붙잡고 그의 영과 생명을 공급받아 그를 표현하는 연습에 돌입해야 한다. 그게 신앙의 본 괘도에 진입한 증거이다. 여기서 부터는 하나님의 특별한 대접을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