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절)
신앙은 극단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아담 편이냐 그리스도 안이냐 양극입니다. 사람이 잘났던 못났던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 기준으로 판정합니다. 한쪽은 죽음의 도성이며 한 쪽은 생명의 궁전입니다. 그리심 산에 서느냐 에발산에 서느냐 하는 문제와 같습니다. 개성공단에 출장을 간 사람들 외엔 그 곳의 주민은 북한 사람이며 휴전선 이남은 남한 사람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소속이라고 번번이 강조하는 겁니다. 신앙은 거듭남의 비밀이 뚜렷해지는 만큼 확신과 자유가 있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활동과 충만함과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인으로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그 과정은 예수그리스도가 이룩하시고 저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참예한 것입니다. 무임승차를 한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전 과정을 다 소급해서 인정하시고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을 하십니다. 아담 안의 사망의 사선을 넘어 탈출(Exodus)한 것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신기한 능력에 나를 갖다 붙이는 믿음이 바로 거듭남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전에는 아담 안에서 사망을 안고서 영원한 불 못으로 가야 할 운명,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어 영원토록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양편 강도를 생각해 보세요. 한 쪽은 멸망, 한 쪽은 낙원, 그 멸망할 강도가 낙원에 갈 강도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며 재창조입니다. 이건 하나의 옙니다. 아담의 자리 곧 죄인의 자리에 있으면 천국을 보지도 못하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동네가 다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거듭난 증거일 뿐, 달라졌으므로 다 거듭났다는 아니지요.
니고데모와 같이 우러러 존경받는 신자도 육은 언제나 육입니다. 그러나 앗시시의 탕자 프랜시스는 거듭난 영을 소유한 분이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요3:6) 언제나 그대롭니다. 다만 어느 순간 자신의 위치와 소속을 안 다음부턴 거룩한 삶의 발동이 걸립니다. 그 동네의 룰을 알았고 자신을 그 안에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거듭남의 신비에 대해 실감을 합니다. 사망과 생명, 죄와 의, 어둠과 빛, 마귀와 하나님 이 경계가 선명합니다. 마귀는 만수산 드린 칡 운운하지만 하나님은 내 백성아 거룩하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을 도표로 그려놓고 양편을 갈라놓고 자신의 선 자리를 확정하시길(12절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