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마6:14-15절)
얼마 전에 한 전직 대통령이 ‘자연적인 부채’라는 말을 쓴 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법적인 책임은 없어도 마음의 부담이 되는 부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이 남을 용서하지 않아도 구원을 상실할 염려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안 갚아도 될 빚이라도 빚은 빚이듯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기도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진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처럼 우리의 빚도 탕감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해야 하고, 용서를 받은 사람이 용서를 해야 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부채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사람이 일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못한다면 그 탕감 받았다는 자체가 실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효력정지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자신도 긍휼히 여김 받지 못하는 대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약2:13) 이렇게 되면 심적 상태가 고약해 집니다. 고요한 갈릴리에 풍랑이 일듯 마음이 동요가 되어 불안정한 상태가 되고 언행에 실수가 잦아집니다. 당연히 스스로 못 마땅하게 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남을 용서한 심령은 난공불락의 성과 같이 견고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용서하는 것은 마음을 다 잡고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한다, 용서한다’ 하면 이미 그건 사랑도 용서도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 용서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밖으로 흘러나갈 때에 사랑도 되고 용서도 됩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갚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요구한 것은 없는 사람이 빚을 진 채무를 변제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거나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도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채무를 탕감해 주기 전에 먼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설정, 자신에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그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짐에 대한 동의와 항복의 의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영혼의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그 의에 배부르게 되고 남을 긍휼히 여깁니다(마5:6-7) 옛날 경주 만석꾼 최 부자 집은 한 해에 나그네를 위해 밥해주고 퍼주며 백리 안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일에 천석을 사용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니까 할 수 있는 일이며 참 부자로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마음의 부채를 갚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먼저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자가 되는 길을 먼저 찾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