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 도다”(시107:20절)
시107편은 구원의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그의 백성은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이게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한 첫 찬송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애굽에서 구원을 받음과 동시에 시작이 되었습니다(출15장) 그러므로 찬송을 부르고 있음은 구원을 받고 있음이며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증거로서 주의 이름 안에서 그 분께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고치시고 난 다음에 모든 위경에서 건지십니다.
성도가 환경과 사정으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에는 주께 부르짖으면 주 안, 곧 거할 성으로 인도하시고 그 길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찬송의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름다운처소와 신기한 양식과 생수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존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일어나는 인생의 고난, 흑암과 사망 그리고 곤고, 수고, 능멸 당함, 고립됨, 곤란을 겪음, 밥맛을 잃을 만한 인생의 쓴잔의 실패,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성도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말씀을 먼저 보내십니다.
말씀을 거역한 것은 인생을 하나님 없이 경영하는 교만입니다. 마음의 강퍅입니다. 육신의 병은 약으로 치료하지만 인간의 영적인 병은 말씀 외엔 약이 없습니다. 거룩이 없이는 안식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이는 찬송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은혜를 잊지 말라고 강조하심은 잔소리 같은 경고입니다. 만약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날마다 입에 달고 마음에 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육신을 따라 생각이 슬며시 미끄러지고 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좇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법을 좇아 사망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몸은 광야에 나와서 가나안을 향해 걷고 있으나 마음은 늘 애굽의 고기가마에 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은혜를 잊지말라’고 자비로운 경고의 메시지를 계속 보내시는 겁니다. 외모는 빛 가운데 나와 있는 것 같으나 중심은 여전히 어둠에서 헤매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아와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미치지 못하므로 인간관계가 아직 막혀있고, 스스로 자책감과 패배감을 안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쓴 미소를 지어야 하는 억지춘향들이 많습니다. 병든 영혼입니다. 말씀을 버렸고, 그 구원의 은총을 벗어나 어둠에 있는 겁니다. 부르짖고 자신을 주께 통회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주께서 다시 말씀을 보내 치료하시고, 그 아들의 보혈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하사, 빛이신 하나님과 다시 교제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1:7-9) 거기서 찬송이 저절로 회복이 됩니다.
*** 어릴 때에 동네 이웃에 잔치가 있어도 그 잔치국수 한 그릇 얻어 먹는 것도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선교사란 이름으로 어디 가서 문전 걸식할 염치뷸구도 갖질 못했습니다. 교회 예산이나 개인의 가계의 2009년 예산을 짤 때에 바람 불고 비오는 광야에 나가 있는 이 복음 나그네에게 줄 부스러기도 함께 생각해 주십시오. 아주 작은 단위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은행 1002-134-818555 김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