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5:17) 그리스도인의 생활사고방식의 중심에 이 말씀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언제나 새로운 인생임을 알고 새로운 목표와 방법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로인해 땅의 장막이 서서히 무너지고 하늘의 장막집이 덫 입혀져 가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는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도 그 분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자’는 식으로는 결코 신앙의 발전이 없다. 이런 결심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말씀을 순종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자’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런 가르침은 되는 것 같으나 안 되고 안 되지만 될 것 같이 보일 뿐이다. 결론은 안 된다. 율법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동으로 새로운 삶을 다짐한다. 그런데 거의 하늘을 향해 맹세하듯 결심을 하는 것을 본다. 과연 그 결심이 오래 갈까? 앞에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놔두고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니고데모, 바로 코앞에 있는 영생이신 주님을 모르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요 묻는 부자청년과 다를 바가 없다. ‘업은 애 찾느라고 3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시간이 매우 길다.
지식이야 금방이다. 필기시험을 치면 언제나 백점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니 내가 아니라 그 분의 생명의 능력에 의해 나는 산다’ 그러나 과연 실제가 그런가? 왜냐하면 아직 우리들에게는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 보다 하늘을 쳐다보고 잘해야겠다는 의지, 곧 율법적인 교육방법이 크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들어와서 사람의 말의 미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한다. 나는 롬8:11절의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나의 몸을 다시 살리는 것'을 장차에 될 일로만 오랫동안 치부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 나의 사고의 고착이 원인이었다.
분명히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난다(고후4:10)고 선언하신다. 성경이 된다면 반드시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신 산 자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하늘을 쳐다보지 말라. 자신 안에 계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주목하라. 그리고 그 분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자신을 보라.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듯이 우리의 옛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서 끝이 났지만 폐한 것이 아니라 그 분 안에서 완전하게 되어 간다. 우리 안에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사는 삶이란 내 안에 계신 그 분께 ‘내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고백하므로 죽을 몸에 그 생명이 퍼져가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는 길의 첩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