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에는 수동태와 중간태, 그리고 능동태가 있습니다. 수동태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 중간태는 현상을 유지하는 상태이며 능동태는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힘을 발동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처음 시작할 어린 신앙일 때는 말씀을 무조건 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듣는 것부터가 먼저입니다. 기도나 일부터 시켜서는 절대 안 됩니다. 갓난아이는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어린아이는 배가 고프면 울고 젖이나 우유를 주면 먹고 싸고 하는 과정에서 자랍니다. 어느 정도 자라면 자기 이름값은 그런대로 하게 됩니다. 그 다음 어른이 되면 남에게 유익이 되는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짐이 되지만 어른은 다른 사람의 짐을 들어줍니다. 보통 말하기를 ‘은혜가 충만하면, 성령이 충만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능동적인 영적인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나도 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만 아무런 영적인 활동의 체제를 그 안에 갖고 있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38년 된 환자처럼 멍하니 앉아서 ‘언제 물이 끓으려나? 누가 나를 안 도와 주나?’하고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 안에 진리의 지식이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에 대한 말씀이 자기의 것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들은 복음이 그저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수동(피동)도 확실한 능동도 아니고 평생을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며 앞장 선 사람들의 뒤를 따릅니다. 그건 멸망으로 가는 넓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의 길일 뿐 그리스도의 의가 아닐 때가 너무 많습니다. 찬송가 496장에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게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 거기에 나의 거듭난 존재의 확인이 있고, 새로운 출발이 있고, 운명의 전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천국의 플랫폼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 머물면서 천국을 침노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능동적인 영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자원하는 영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기도의 영을 발동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영의 자세로 발진시키게 됩니다. 물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인인 옛 사람이 장사되고 함께 다시 산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한 영원한 피동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분에게 점점 더 가까이 가게 되면 자신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그 분이 하신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주 예수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이며 그 분의 종의 길입니다. 능동적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축복하게 됩니다. 그에 대한 보상이 어떠한지는 여러분이 그 상태를 한 번 만들어 보시면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