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하다는 말을 풀어보면 믿음이 현실화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신뢰에 대한 결과를 만드는 사람을 ‘믿음직스럽다’는 말을 한다. 믿음과 충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믿음은 바로 행동으로 결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의 주체가 내가 되어서는 ‘나는 충성했노라’는 자랑밖에 남지 않는다. 이건 자신의 노력에 대한 실적일 뿐 자신의 믿음이 일한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신학을 했다 안 했다는 것으로 설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일반적인 선별의 기준이다. 일단 무분별한 설교자를 제한하는 의미는 있다. 그러나 신학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복음전도자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신학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대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에 신학의 과정을 마치기에 자격과 함께 그 소양을 함께 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공부하는 학문이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공부하는 과정이냐?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신학박사가 구약의 약속의 성취를 구속사적으로 한편의 드라마처럼 구술을 할 수 있으므로 듣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정작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후는 얼버무리고 만다. 이런 분을 말하자면 성경에 관하여는 박식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신학에는 어둡다는 뜻이다.
혹시 이런 사람들이 이 시대의 인기 있는 신학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양의 이성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죄인인 인간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 못하는 신학의 풍조가 난립하는 것이 바로 현재교회의 문제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얼마든지 설득력 있고 흥미 있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당신이 말하는 그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그 결과 당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가? 등의 질문에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 바로 예수의 행적과 그 분이 하신 일과 십자가 대속의 사활의 이후에 진리의 영, 생명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삼신론이니 양태론이니 하는 이야기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느냐? 그 분의 영과 생명이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대로 나도 일 할 수 있느냐?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나 있는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므로 나를 혼자두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고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씀을 하시듯 ‘그리스도가 내 안에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주 예수그리스도는 언제나 나를 혼자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다. 나는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고 담대히 외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