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에게는 후회와 죄책감과 저주의식이 늘 따르기 때문에 평안이 없습니다. 의인이 사자처럼 담대한 것은 자신의 선한 양심에 대한 자신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은 곧이어 평강의 영을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그 평강을 따라 기쁨이 깃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사람들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가지론에서 나온 ‘니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 덮어 놓고 믿어야 해’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경외감에다 믿음을 강조하는 일과 인식론에 의한 믿음의 강조 또한 여간 문제가 아닙니다.
‘믿으면 그대로 되는거야 한 번 믿어 봐’ 하는 식의 가르침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따라 생명의 공급을 받고, 마침내 내적인 풍성함으로 인해 밖으로 열매가 드러나는 삶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계시는 의와 생명의 주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난 자 곧 거듭난 사람은 덮어 놓고 믿는 믿음에서 회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찾아 방황을 합니다. 그러다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안에 모셔 들입니다. 아니 이미 희망이 제로 퍼센트인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장사하고 그리스도 안에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조치를 받아들입니다. 바로 세례입니다.
그 때 부터는 자신 안에서 의와 거룩과 영광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의 풍성함을 의지하여 은혜위에 은혜를 구합니다. 처음 어릴 때에는 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나 바라다가 나중에 장성해지면 스스로 어디 도울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른 편 양 곧 의인들의 길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땅의 종교꾼들은 자신의 존재의 변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평생토록 자신이 주장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변화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을 열심히 해서 영생을 얻으려는 부자 청년과 같습니다. 바로 욥이지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쓰레기 더미와 같은 흙집에 갇힌 존재임을 알고 누더기와 같은 옷을 입은 자신의 몰골을 보고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갈아 입고 날마다 주의 보혈과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합니다. 세례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신을 점검하고 마귀가 꼬드기는 옛사람의 옷 곧 자신의 육신의 의를 부인하고 주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 자신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대 제사장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를 앙망합니다. 땅의 중력을 느끼지 않는 영적인 상태에서 잔잔할 평강과 기쁨을 얻습니다. 중단 없는 기도와 감사도 따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은 사람 곧 그리스도를 주와 신랑으로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대로 되어 가게 하시고 그대로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최상의 상태를 지키려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영적인 지식을 총동원하며 힘을 다해 영적인 전투를 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