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이 자동차운전을 하는 중에 사람을 다치게 하면 업무상 과실이라고 한다. 고의성이 없는 잘못을 범했다는 이유로 재판과정에서 그 정상을 참작하여 처벌을 한다.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업무상과실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실족시키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아무도 이일에 ‘나는 아니다’라고 장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가 누구인가? 예수님의 수제자이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후의 빈 무덤도 확인하고 부활의 주님도 육안으로 봤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할 때 수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도 한 사람이다.
이 베드로가 업무상과실에 걸려 바울에게 면책을 당했다. 얼굴을 똑바로 보고 나무랐다는 말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외식은 진리의 사람에게도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와 같다. 바울의 면책의 내용은 ‘너는 유대인으로서 진리 안에서 자유하므로 율법과 상관없는 이방인처럼 살면서 순간적인 신앙의 업무상과실인 외식으로 처음부터 율법과 상관없는 이방인을 율법의 종으로 끌어 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의 사랑과 판단을 받아서 그 안에서 육신으로 부터는 자유의 믿음, 곧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베드로가 할례없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다가 유대인이 다가오니 그만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다가 대쪽같은 쓴 소리에게 걸리고 말았다.
베드로는 이미 안다. 할례나 무 할례가 구원받아 의롭게 되는 일에는 눈곱만큼의 보탬도 안 된다는 사실을... 율법은 정죄하여 죽이는 것으로 진리의 복음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유대인의 양심의 기준을 의식하여 외식함으로 말미암아 어처구니없는 업무상과실을 범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닐까? 신앙이 어릴 때에는 다른 사람의 눈이 도움이 된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에는 ‘교실 앞으로’하고 줄지어 걸어가는 것이 질서를 위해서 나은 것과 같다. 그러나 장성한 자가 되었음에도 사람을 의식하는 여론 신앙에 머물고 있으면 안 된다. 사람만큼 무서운 게 세상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왕따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람의 기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진리의 복음을 가진 자는 그 진리 안에서 자유해야 한다.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 그리고 자신에게는 진리를 적용하고 남은 율법으로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율법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는 율법을 적용시키는 업무상 과실이 왕왕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나아가서 사람들의 선악의 관점의 종이 되어 베드로처럼 엉거주춤하지도 말아야 한다. 진리의 사람은 법이 아니라 원리를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선악의 양심을 따라 자신을 단속하고 또 남에게 보이려 하는 외식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오직 진리의 복음 위에 굳게 서서 육체를 미워하고 영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빛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