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은 협곡을 타고 남쪽으로 몰려 내려갔다. 때마침 내리는 눈발도 바람을 타고 정선읍 광하리에서 귤암리 방향으로 날렸다. 귤암리를 스치고 지나간 바람은 동강변 마을인 가수리와 가탄을 지나 고성산성을 넘어 소사와 연포마을을 휩쓸며 내달렸다. 바람과 함께 빗금을 그으며 날리던 눈발은 얼음이 깔린 동강으로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중국의 계림보다 아름답다고 한 정선 동강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신이 빚은 곳이라고 명명한 동강에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불자 내린 눈은 언 동강 위로 눈톱을 만들었다. 눈톱은 긴 줄을 이으며 물결 모양으로 일렁거렸다. 카메라를 든 한 사내가 그 모습을 담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 사내가 동강에 나타난 것은 이른 아침 해가 뜨기도 전의 일이었다. 동강변에 차를 멈춘 사내는 아침식사를 하지 못했던 듯 버너에 물을 끓여 컵라면 하나를 먹고, 일회용 커피를 먹고 남은 컵라면 용기에 타 마셨다.
사내가 온 지 한 시간이 지나서 겨울의 늦은 해가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동강의 뼝대(병풍처럼 펼쳐진 절벽) 위에 걸쳐졌다. 동강에서 만나는 일출은 그렇게 느리고도 장엄하게 시작되었다. 사내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얼음이 깔린 동강으로 내려갔다. 햇살이 비스듬하게 동강의 숨겨진 비경을 비추었다. 아름다웠다.
햇살이 각도를 좁히며 동강으로 슬금슬금 내려오자 셔터를 누르는 사내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협곡인 동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시간, 눈보라도 알맞게 일어 천지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도 싶었다.
찰칵찰칵……
사내는 시시각각으로 화려하게 몸을 바꾸는 동강을 담기 위해 쉼 없이 셔터를 눌렀다. 동강은 투명한 블루빛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선홍빛으로 변했다. 빛이 만들어내는 동강의 풍경은 사내의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잠시 후 햇살이 완전히 동강을 점령했을 땐 물결무늬의 눈톱이 마치 보석을 뿌려놓은 듯 반짝거렸다. 사내는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더니 어느 순간 언 강에 누워 저 홀로 낄낄거리며 오늘의 작업에 대한 만족감을 마음껏 표시했다.
“아하하. 이렇게 멋진 풍경을 담다니!”
사내가 몸을 뒹굴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귤암리의 뼝대에 살고 있는 동강고랭이였다.
긴 수염이 신선과도 같아 동강할아범이라 칭하는 동강고랭이는 사내가 동강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가 동강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봄 동강할미꽃이 막 피기 시작할 때도 이틀을 묵으며 동강할미꽃을 카메라에 담았고, 보름 전쯤에도 동강에 와서 하루를 꼬박 머물며 동강고랭이를 카메라에 담아갔다. 그때 얼굴을 익힌 사내라 동강고랭이는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동강고랭이는 사내가 기뻐하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을 언 강에 누워있던 사내는 카메라를 챙겨 차에 올랐다. 잠시 후 사내의 차는 가수리 방향으로 눈보라를 일으키며 내달렸다.
사내가 떠나자 주변은 다시 고요해졌다. 겨울 동강은 고요해서 더 아름답다. 그 시절 동강에 오면 머릿속이 텅 빌 정도로 무욕의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아무나 동강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겨울 동강이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이해하는 자만이 찾는다. 그런 이유로 동강의 겨울은 눈길을 홀로 걷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쓸쓸하다.
사람들은 언 손을 비벼가며 동강에 와서는 동강이 만들어낸 쓸쓸함에 취했고, 그 아름다움을 견디지 못해 눈물지었다. 또 어떤 이는 얼어붙은 동강을 맨발로 걸어보지 않고는 인생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 이후 겨울 동강을 맨발로 걷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겨울 동강은 그런 곳이었다.
해가 떠도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눈발도 더 굵어졌다. 사내가 떠나면서 만들어 놓은 흔적이 내리는 눈에 사라지고 있었다. 눈톱이 만들어졌던 동강도 하얗게 제 몸을 덮기 시작했다. 동강고랭이의 긴 수염에도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머물렀다
바람에 날리기를 반복했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눈은 쉬지 않고 내렸고, 이튿날 아침엔 온 세상이 눈 천지로 변했다. 동강고랭이는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아침을 맞았다. 폭설이 내린 탓에 길엔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동강고랭이는 초자연적인 동강의 모습에 자주 감격했다.
동강은 자신이 생각해도 신이 내린 선물임에는 틀림없었다.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동강고랭이 옆엔 동강에서만 꽃을 피우는 동강할미꽃이 있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동강할미꽃은 비록 할미꽃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긴 했어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우아함과 기품이 느껴지는 꽃이었다. 하지만 동강할미꽃은 지금 겨울잠을 자는 중이다. 지난봄 꽃잎을 떨군 동강할미꽃은 몰려오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겨울잠에 들어갔다. 근처에 함께 있는 돌단풍도 마찬가지다.
동강할미꽃과 돌단풍이 잠에서 깨어날 즈음이면 비로소 동강에도 긴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찾아왔다. 그때까지 동강고랭이는 홀로 몰아치는 눈바람을 맞으며 긴 겨울을 보내야 한다. 동강고랭이에게 긴 겨울은 쓸쓸한 계절이고 외로운 계절이기도 했다. 조잘조잘 수다를 잘 떠는 동강할미꽃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그를 우울하게 했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동강고랭이는 어서 겨울이 갔으면 싶었다.
지난 봄 꽃을 활짝 피운 동강할미꽃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누구는 보랏빛으로 피고 누구는 흰빛으로 또 누구는 분홍빛으로 피어 자태를 마음껏 자랑했다. 동강할미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은 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동강까지 한 걸음에 달려왔다. 그들은 뼝대에 붙어 수줍게 피어난 동강할미꽃을 바라보며 탄성을 쏟아냈다.
<정선군 군화: 동강할미꽃>-
동강할미꽃은 보름 정도 꽃을 피우다 시들어간다. 3월 말이면 피기 시작해 4월 중순이면 화려했던 꽃잎을 뼝대 아래로 떨군다. 그런 후 동강할미꽃을 다시 만나려면 1년을 꼬박 기다려야만 했다. 그때쯤이면 동강고랭이의 수염도 시들어 버리고 새로운 싹이 돋아난다. 새롭게 돋아난 싹은 가을이 되면서 멋진 수염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동강고랭이와 동강할미꽃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길어야 보름, 짧은 사랑인 것이다.
동강고랭이와 동강할미꽃의 짧은 만남과 짧은 사랑은 그래서 더 진한 감동을 준다. 하여 동강에서 나누는 사랑은 기다림부터 배워야 한다. 그 긴 기다림을 견딘 후에야 짧지만 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해가 바뀌고 폭설이 몇 차례 내렸다. 눈을 뜨기조차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었고, 강추위도 몇 번 지나갔다. 언강에서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쩡쩡 났다. 그 소리는 협곡을 한동안 흔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부터 얼었던 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겨우내 쌓였던 눈도 응달만 남기고 다 녹았다. 겨울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난 후부터는 훈풍까지 불기 시작했다. 동강변 길로 거름을 실은 경운기가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봄을 준비하는 동강변 사람들의 마음이 동강을 따라 흘러갔다. 경운기가 지나가고도 거름냄새는 한참 동안이나 남아 있었다. 봄이 오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이젠 내리쬐는 햇볕도 따뜻했다. 불어오는 바람도 싱그러웠다. 며칠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봄소식을 알리는 버들강아지가 뽀얀 솜털을 내밀기 시작했다. 세상에 갓 나온 어린 솜털들은 바람이 불어오자 신기한 듯 흔들렸다. 나무들도 얼었던 몸을 녹이며 기지개를 한껏 켰다.
긴 겨울을 보낸 동강고랭이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동강을 굽어보았다.
강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자맥질을 하던 동강비오리는 배가 불렀던지 모래톱에 앉아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산악자전거를 탄 일행이 동강변을 시원스럽게 달리는 모습도 보였다. 형형색색인 그들의 옷차림에서 봄이 느껴졌다. 그들은 경치 좋은 곳을 찾아 두 줄로 서서는 동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며칠 뒤엔 봄눈이 내렸다. 제법 많이 내렸지만 해가 뜨자 그야말로 봄눈 녹듯 스르륵 녹아 버렸다. 봄눈이 내린 후부터는 강변의 버드나무가 물을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지났다. 회색빛이던 버드나무가 연초록으로 변했고,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도 낭창낭창 춤을 추며 봄맞이를 하고 있었다.
동강고랭이-
그 무렵, 동강고랭이의 턱 밑도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새싹이 돋기 시작한 것이었다. 뿌리부터 밀고 올라오는 새싹이 무성해질 때가 되면 동강고랭이는 새로운 고랭이가 되어 그 삶을 살게 된다. 한 시절이 가는 것이다. 동강고랭이는 자신의 시대가 가기 전 동강할미꽃을 만나야 했다. 그것이 동강고랭이의 운명이었다. 동강고랭이는 그렇게 수천 년을 보냈다.
동강고랭이는 곁에 있는 동강할미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강할미꽃은 아직 봄기운을 느끼지 못했는지 조용하다. 그녀의 긴 겨울잠이 못내 아쉬운 어느 날 오후, 동강고랭이는 홀로 긴 수염을 날리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몇 밤이 지나갔다. 봄이 한 뼘씩 다가오면 올수록 동강고랭이는 초췌하게 변해갔다. 동강을 굽어보며 멋있게 휘날리던 긴 수염도 조금씩 색이 바라고 있었고, 작은 바람에도 수염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쓸쓸했다.
꽃샘추위가 한차례 지나가고 난 다음 양지바른 곳에 둥지를 튼 생강나무가 꽃봉오리를 살짝 내밀었다. 동강에서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생강나무는 그 꽃의 향기가 너무도 아찔해 잠시만 맡아도 혼절할 정도였다. 생강나무가 꽃을 피우면 곧이어 동강할미꽃도 꽃을
피운다. 동강할미꽃을 만날 날이 그리머지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생강나무가 드디어 꽃봉오리를 내민 것이다. 아, 동강고랭이는 가슴이 벅차올라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날부터 동강고랭이는 하루 몇 차례씩 동강할미꽃을 살폈다. 그 즈음 동강고랭이는 그녀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 멋진 꽃을 피워내는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제 늦은 오후, 동강할미꽃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동강할미꽃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아, 잘 잤다.”했다. 그 순간 동강고랭이는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곤 지나가는 바람을 머물게 하여 흐트러진 수염을 다듬었다.
수염을 다듬다 보니 동강고랭이의 턱밑에도 이젠 까슬까슬한 새싹이 제법 돋아났다. 덧없는 것이 세월이었다. 동강고랭이도 이젠 새로운 수염에게 생을 물려주고 지난 1년간의 삶을 마감할 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완연한 봄날이라 해도 좋을 만큼 따듯한 날이 이어졌다. 봄이 오자 겨우내 움츠려 있던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봄은 농부의 밭에도 내려앉았고, 마른풀이 서걱거리던 풀밭에도 내려앉았다. 또 봄은 어린아이의 얼굴에도 내려앉았고, 등 굽은 할머니의 지팡이에도 내려앉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환희의 노래를 부르며 일제히 깨어나 희망을 노래하는 시간, 동강할미꽃도 꽃대를 힘차게 밀어 올리며 키를 쑥쑥 키웠다. 동강고랭이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동강할미꽃이 작은 꽃봉오리를 만들었을 땐 때맞춰 봄비도 내려 주었다. 비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렸다. 그러나 동강에서 살아가는 생물체들은 저마다 빗물을 빨아들이느라 소란스러웠다.
비가 그치고 해가 반짝 떴을 땐 동강이 활짝 깨어나는 듯싶었다. 풀들은 저마다 키를 키우기 시작했다. 나무들도 새순을 만들기 위해
작은 봉오리들을 힘차게 부풀렸다. 양지쪽에 있던 진달래가 봉긋한 꽃봉오리를 만들어내는 그 시간 생강나무가 노란 꽃봉오리를 활짝 열었다.
동강고랭이는 생강나무꽃에서 나는 향기를 맡으며 동강할미꽃을 바라보았다. 동강할미꽃이 밀어올린 꽃대는 다섯 개나 되었다. 그녀도 비를 흠뻑 빨아들인 덕분인지 꽃봉오리를 하나씩 하나씩 수줍게 열고 있었다.
꽃잎이 열리는 것은 잠깐이더니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그 순간 동강고랭이는 아, 하고 짧은 탄성을 지었다. 동강할미꽃이 피운 꽃은 흰색이었다. 흰색은 여러 동강할미꽃 중에서도 가장 귀한 꽃이었다. 흰색은 피어나는 꽃의 수도 적지만 그 우아함과 순백함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도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흰 동강할미꽃이 꽃봉오리를 터트리자 동강 뼝대에 있던 다른 동강할미꽃들도 일제히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했다. 어떤 꽃은 분홍으로 피어나고 어떤 꽃은 보라색으로 피어났다.
동강할미꽃이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한지 몇 시간 만에 다섯 개 꽃이 다 열렸다. 오랜 기다림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흰색의 동강할미꽃이 피어나자 주변이 환해졌다. 동강고랭이는 긴 수염을 가다듬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아, 상쾌해.”
동강고랭이의 기다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강할미꽃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조잘거리듯 말했다. 흰색의 동강할미꽃은 마치 둥지에서 막 알을 깨고 나온 딱새 새끼처럼 하늘을 향해 꽃잎을 활짝 열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고운 자태는 하늘의 선녀가 하강한 듯 했다.
할미꽃의 아름다운 모습에 동강고랭이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동강고랭이는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동강할미꽃을 만났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은 멋진 수염을 가진 동강할아범이 아닌 초로의 할아범일 뿐이었다.
반면에 동강할미꽃은 막 피어난 꽃이라 아름답기도 하지만 신비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둘이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보름이었다. 긴 기다림치고 사랑을 나눌 시간은 턱없이 적었던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동강고랭이가 아는 척을 했다.
“할멈, 나요. 동강고랭이.”
“어머, 누구보고 할멈이라는 거예요?”
동강할미꽃이 동강고랭이를 보며 쏘아붙이듯 말했다. 머쓱해진 동강고랭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동강할미꽃은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동강고랭이를 쳐다보았다.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동강고랭이는 봄빛으로 물든 동강을 굽어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동강고랭이는 그러면서‘아, 시간이 없는데……’라고만 중얼거렸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돌단풍이 인사를 건넸다.
“동강할아범 건강하시죠?”
“아직은, 괜찮구나. 너도 건강하게 피어났구나. 아주 멋있어.”
“감사합니다. 올핸 봄이 조금 늦은 거 같죠?”
“그렇구나. 지난겨울 무척 추웠거든.”
동강고랭이가 혹독하던 동강의 겨울 추위를 생각하며 말했다.
“그렇게 추웠다는데 건강하게 보여 다행이에요.”
“널 만나려고 이렇게 살아있었나 보다.”
“무슨 말씀을요, 오래 사셔야지요.”
돌단풍이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동강할미꽃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동강할멈, 올해도 곱게 피어났네요?”
“뭐야? 돌단풍 너까지 할멈이라고 놀리는 거냐?”
동강할미꽃이 눈을 흘기며 돌단풍을 윽박질렀다.
“어, 할미꽃을 보고 할멈이라고 하는데 왜 그러세요?”
“할미꽃이라고 하는 거야 내 이름이니까 할 수 없지만 할멈이란 말은 정말 듣기 싫어.”
동강할미꽃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헤, 할멈이나 할미꽃이나 무슨 차이가 있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할멈이라는 말은 듣기만 해도 온 몸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 같단 말야. 그러니 앞으론 할멈이라고 부르지 마. 알았지?”
“헤헤 그럽죠. 할미꽃님. 암튼 올해도 두루두루 많은 사랑 받으세요.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돌단풍이 입을 삐죽 내밀며 동료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해마다 봄이면 생기는 일이었다. 동강할미꽃은 동강에서 자신보다 예쁜 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동강할미꽃에게 할멈이라고 했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동강고랭이는 마치 숲속의 공주라도 되는 양 눈을 치켜뜨고 있는 동강할미꽃을 물끄러미 바라만볼 뿐 말이 없었다. 동강할미꽃이 스스로 동강할멈이라는 말을 인정할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하는 게 동강고랭이의 숙명인 듯싶었다.
동강에 꽃향기가 퍼지기 시작할 즈음 지난겨울 동강을 찾았던 사내가 다시 동강에 왔다. 이번엔 트럭을 몰고 왔다. 그 트럭엔 이젤과 사진 액자가 잔뜩 실려 있었다. 트럭에서 내려진 사진은 죄다 동강고랭이와 동강할미꽃 사진뿐이었다.
사내는 자신이 가지고 온 액자를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다 전시를 했다. 생각해보니 사내만큼 동강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동강고랭이는 액자에 담겨있는 자신의 수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겨울만 해도 저렇게 멋있었구나……’
동강할미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자 동강은 할미꽃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이 시기에 동강할미꽃을 보지 못하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어떤 이는 부산에서 왔고, 어떤 이는 순천에서도 왔다. 동이 트기 전 동강에 도착한 이들도 많았다. 밤새 차를 몰아 동강으로 왔다는 그들은 동강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들은 각자 챙겨온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동강할미꽃을 찾아 나섰다.
동강할미꽃은 해가 떨어지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해가 뜨면 꽃잎을 활짝 열었다. 사람들이 밤잠을 포기하면서까지 동강으로 온 것은 동강할미꽃이 꽃잎을 여는 모습이나 이슬을 함초롬 머금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동강할미꽃은 들판이나 풀밭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동강변 마을인 귤암리 뼝대에서만 자생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의 정성이 있지 않고서는 그 고운 자태를 만나기 힘들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암벽을 기어올랐다. 더러 았다. 그들은 각자 챙겨온 카메라를 꺼내 들고는 동강할미꽃을 찾아 나섰다.
동강할미꽃은 해가 떨어지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해가 뜨면 꽃잎을 활짝 열었다. 사람들이 밤잠을 포기하면서까지 동강으로 온 것은 동강할미꽃이 꽃잎을 여는 모습이나 이슬을 함초롬 머금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동강할미꽃은 들판이나 풀밭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동강변 마을인 귤암리 뼝대에서만 자생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의 정성이 있지 않고서는 그 고운 자태를 만나기 힘들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암벽을 기어올랐다. 더러는 암벽을 기어오르다 떨어지는 사고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남들이 찾아 내지 못한 동강할미꽃을 카메라에 담아가기 위한 일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 동강변은 주차장이 되다시피 했다. 방송 카메라까지 동원되어 귤암리 일대는 하루 종일 차량과 사람들로 뒤섞였다. 사내가 전시한 사진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찍은 동강할미꽃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꽃은 당연 흰색 꽃이었다.
보라와 분홍 할미꽃은 많지만 흰색은 귀했다. 귀한만큼 인기를 독차지 했지만 문제는 흰색 할미꽃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거였다. 사람들은 망원렌즈를 동원해 흰색 할미꽃을 잡아 당겼지만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담지는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쉬움만 남기고 발길을 돌렸지만 어떤 사람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흰색할미꽃을 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일로 동강할미꽃이 핀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고가 두 번이나 났다.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두 사람 다 암벽을 기어오르다 미끄러진 사고였다. 마을 사람들이 동강할미꽃을 보존하기 위해 암벽으로 오르는 것을 막고 있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그 마음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암만 봐도 난 인기가 너무 좋은 것 같아.”
흰색 할미꽃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봐요, 흰 동강할미꽃. 동강할미꽃 때문에 사람들이 다치고 있는데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이오.”
“고랭이 할아범. 사실이 그런 거 아닌가요? 저 많은 사람 중에 고랭이 할아범을 찾아오는 사람 있던가요? 없잖아요.”
“우리 고랭이들도 작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지켜보니 그 꽃을 담는 사람도 많습디다.”
“흥, 그거야 할미꽃을 찍다가 심심하니 한 컷씩 담아가는 거지 고랭이가 아름다워서 그러는 줄 알아요?”
“허참. 할멈, 꽃이 피기는 어려워도 지는 것은 금방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수? 너무 난체 하지 말아요. 언젠간 후회할 테니까.”
“후회해도 내가 할 테니까 몇 가닥 남지 않은 할아범 수염이나 잘 챙기시구랴.”
동강할미꽃이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이봐요, 할멈. 그러는 거 아니오. 내가 할멈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오?”
“할아범이 날 사랑하는 거야 잘 알지만 나는 아직 청춘이랍니다. 그러니 아직은 할아범에게 마음을 보낼 수가 없네요.”
“좋아요, 그럼 할멈이 늙어질 때까지 내 기다리리다.”
시기를 보아하니 며칠만 더 기다리면 동강할멈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 줄 것 같았다. 지금껏 기다렸는데 그깟 며칠이야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해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주말과 휴일이 지나갔다. 월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차 한 대가 조용히 동강으로 들어오더니 뼝대 아래에 멈췄다. 그는 예의 여느 사람들처럼 카메라를 챙겨 동강할미꽃을 담았다.
사내는 며칠 전에도 동강에 나타났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망원렌즈로 흰 동강할미꽃을 유심히 살폈던 사람이었다. 그가 다시 동강에 온 것이었다.
“어어, 저 양반 어디로 올라오는 거야?”
이팝 꽃 같이 작고 하얀 꽃을 멋지게 피운 돌단풍이 뼝대 아래를 보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동강고랭이도 고개를 빼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길에서 사진을 찍던 사내가 뼝대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작심한 듯 배낭을 짊어진 채로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암벽을 타고 올랐다.
사내는 보라색 동강할미꽃을 그냥 지나치더니 돌단풍도 본체만체 지나쳤다.
사내는 튀어나온 돌부리를 손으로 감싸고는 어린 아이가 배밀이를 하듯 조심스럽게 암벽을 기어올랐다.
“저, 저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동강고랭이가 사내를 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동강할미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암벽을 기어올랐지만 사내만큼 높이 암벽을 기어 오른 사람은 없었다. 저 정도 높이면 오히려 내려갈 일이 걱정될 정도였다.
사내는 분홍색 동강할미꽃도 그냥 지나치더니 그로부터 조금 더 위에 있는 흰 동강할미꽃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어머, 저 남자가 날 보고 있어. 어쩜 좋아. 지금껏 날 보러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첨이야. 어머, 좋아라.”
흰 동강할미꽃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 와중에도 화들짝 웃으며 말했다.
“어허, 할멈. 지난번 사고 난 일을 벌써 잊었수? 저러다 큰일 납니다.”
“자꾸만 할멈이라고 하지 말아요. 할아범같이 볼품없는 고랭이가 아니라 난 아직 어여쁜 꽃이라구요. 그리고 저 사람 아무래도 날 사랑하는 거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오겠어요?”
“허참!”
“호호, 용기 있는 사람이 미인을 만난다고 하잖아요. 저 사람도 나를 만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어요?”
흰 동강할미꽃이 꽃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흰 동강할미꽃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다.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봄인데도 사내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내는 돌부리를 찾아 두 발을 걸치더니 얼굴에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훔쳐냈다.
“멋진 흰 동강할미꽃이로군. 아주 맘에 들어.”
사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배낭에서 작은 모종삽과 플라스틱 통을 꺼냈다. 사내는 몸을 암벽에 바짝 붙이고는 모종삽으로 흰 동강할미꽃을 뜨기 시작했다.
“어머, 이 사람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고랭이 할아범 나 좀 살려줘요.”
놀란 흰 동강할미꽃이 비명을 질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바위틈에 박혀 있는 흰 동강할미꽃의 뿌리가 모종삽에 의해 조심스럽게 떠지고 있었다. 동강고랭이가 사내에게“흰 동강할미꽃을 그냥 둬!”라고 비명 같은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그 외침이 사내의 귀에 들릴 리가 만무했다. 흰 동강할미꽃이 그렇게 당하고 있어도 동강고랭이는 동강할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소리를 치는 일밖에 없었다.
흰 동강할미꽃의 뿌리가 잘려나가고 몸체가 들려졌다. 흰 동강할미꽃이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잘린 뿌리에서는 허연 피가 맺혀졌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다섯 송이의 꽃들은 휘청이면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흰 동강할미꽃을 떼어 낸 사내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빙긋 웃었다.
“자, 이제 우리 집으로 가자. 오늘부터 넌 내 자식이 되는 거란다.”
사내가 흰 동강할미꽃을 보며 말했다.
“아녜요, 난 이곳이 더 좋아요. 날 데리고 가지 마세요. 난 동강에서만 살 수 있는 몸이라고요. 그러니 날 이곳에 살게 해 주세요. 예?”
흰 동강할미꽃이 애원했지만 사내는 저 혼자 웃으며 흰 동강할미꽃을 가지고 온 플라스틱 통에 넣었다. 아름답던 흰 동강할미꽃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통 속으로 들어갔다. 동강할멈의 비명 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악, 고랭이 할아범 나 좀 살려주세요!”
사내가 플라스틱 통 뚜껑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사내의 몸이 중심을 잃었는지 상체가 기우뚱했다. 다리를 받치고 있던 돌부리가 부서진 모양이었다. 한쪽 다리가 미끄러져 내리는가 싶더니 동시에 사내의 얼굴이 암벽을 들이 박았다. 사내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손에 들려졌던 플라스틱 통이 허공을 구르고 사내의 몸 또한 스르륵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사내의 몸이 잠깐 사이에 동강고랭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동강고랭이가 사내를 찾는 사이 사내의 몸이 암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두어 번 나더니 이내 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 이어 플라스틱 통 떨어지는 소리도 퍽, 하고 났다. 사내의 몸엔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동강고랭이는 넋이 나간 듯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플라스틱 통은 깨어져 있고, 흰 동강할미꽃을 채취하던 사내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동안 동강할미꽃을 몰래 채취하는 일은 많았다. 동강할미꽃을 혼자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다. 그런 이유로 한 때는 일부 채취꾼들로 인해 동강할미꽃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 동강할미꽃이 어느 꽃보다 아름답고 귀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욕심만 컸지 동강할미꽃을 잘 살려내지 못했다. 동강할미꽃이 척박한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특성이 있어 아무리 잘 보살핀다 해도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많은 동강할미꽃이 죽어갔다. 이번 사고도 그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예전에도 동강할미꽃을 채취하려던 사람이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큰 사고는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스런 일이 한순간에 벌어진 것이다. 인간들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동강고랭이는 어쩔 줄을 모르며 흰 동강할미꽃 이름만 불렀다.
“동강할멈! 동강할멈!”
그러나 아무리 소리쳐도 흰 동강할멈의 어떤 외침이나 신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슬픔에 빠진 동강고랭이는 눈물을 쏟으며 엉성하게 남은 수염을 쥐어뜯었다. 봄이 오면 동강할미꽃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겠다는 기다림 하나로 긴 겨울을 보냈건만 몰지각한 인간에 의해 그 사랑이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그런 일이 벌어졌지만 동강은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여울을 타고 흘러가는 강물 소리뿐이었다. 아직은 사람들이 움직이기엔 이른 시각, 잠에서 깬 동강 비오리도 흐르는 물을 바라만볼 뿐 자맥질을 하거나 날갯짓을 하지 않았다. 그 시간 동강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침이 오는 것이 즐거운 작은 새떼들뿐이었다. 새들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는 양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언저리를 재잘거리며 포륵포륵 날고 있었다.
길바닥으로 떨어진 사내는 움직임이 없었다. 몇 분 전만 해도 땀을 뻘뻘 흘리며 암벽을 기어오르던 사내였다. 그랬던 그가 몇 분 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사내는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앞날이었다.
사내가 떨어진 높이는 어림잡아도 10여m는 되어 보였다.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을 경험해보지 못한 석회암 지대의 암벽은 쉽게 부서지고 갈라졌다. 그러니 애초부터 사람이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은 되지 못했다.
사내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엔 흰 동강할미꽃이 있었다. 플라스틱 통은 충격으로 깨어졌고 동강할미꽃은 벌어진 틈으로 설핏 보였다. 아름답던 꽃송이는 떨어질 때 난 상처로 곳곳이 문드러져 있었다. 흰색이었던 동강할미꽃이 누렇게 죽어가는 그 시간, 동강고랭이는 슬픔을 견디지 못한 채 컥컥 울음을 삼키며 울고 있었다.
동강에 살고 있는 다른 동강할미꽃과 돌단풍도 충격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동강 전체가 눈물바다 되어 울음을 울고 있을 때 자전거를 탄 노인이 동강으로 들어섰다. 봄이 되면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산책하듯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강변길에 주차 되어 있는 사내의 차를 발견한 노인은 무심코 사내가 추락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 사람이 쓰러졌어!”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내를 발견한 노인은 기겁을 한 표정으로 급히 페달을 밟았다. 노인이 사라지고 난 후 30분이나 지났을까.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동강으로 달려왔다. 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사진부터 찍었다.
“이 사람 이거 동강할미꽃을 채취하다 떨어진 모양이로군. 왜들 이러는지 원. 그래, 목숨은 붙어 있는 겨?”
“아직 숨은 붙어 있습니다.”
“그럼 빨리 옮겨.”
차에서 내린 구급대원들이 그런 말을 주고받더니 사내를 들것에 옮겨 신고는 차량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구급차가 다시 사이렌을 울리며 동강을 떠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몇 분도 되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자 동강은 언제 그런 소란이 있었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사내가 떠난 자리엔 핏자국만 선명했다. 그 옆엔 흰 동강할미꽃이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진 흰 동강할미꽃은 사람이 아닌 까닭에 구급대원에게 구조조차 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또 30분 후쯤 경찰 순찰차가 다녀갔다. 동강에 찬란한 해가 떠오르고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핏자국은 모래로 뿌려져 사고가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카메라를 멘 사람들이 동강할미꽃을 담기 위해 분주히 오고갔다. 동강할미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여인들의 옷자락에선 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들 속에 흰 동강할미꽃은 철저하게 버려진 채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에 플라스틱 통이 이리저리 채였다. 그 바람에 흰 동강할미꽃이 통 밖으로 튕겨지듯 나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꽃이 자신들이 그렇게 카메라에 담고 싶은 흰 동강할미꽃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강고랭이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다. 지금이라도 흰 동강할미꽃을 거두면 살아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눈물만 흘리고 있는 사이 흰 동강할미꽃이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기 시작했다. 잠시 후 흰 동강할미꽃의 꽃잎은 형체를 알아 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짓이겨졌다. 동강고랭이의 통곡이 다시 이어졌다.
부서진 꽃잎이 말라가고 있었다. 물기가 빠져나간 뿌리도 단단하게 굳어갔다. 그렇게 죽어가는 흰 동강할미꽃을 거둔 이는 사진을 전시하던 사내였다.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동강할미꽃을 찾아다니던 사내가 흉하게 짓이겨진 흰 동강할미꽃을 발견했다.
“어, 이건 흰 동강할미꽃 아냐?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사내가 암벽 위를 올려다보고는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지 흉하게 일그러진 흰 동강할미꽃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는 흰 동강할미꽃을 잘 수습하여 흙이 있는 바위틈에 뿌리를 묻었다. 사내가 전시를 하던 기간 내내 흰 동강할미꽃을 정성껏 보살폈지만 그녀는 살아나지 못했다.
검게 말라죽은 흰 동강할미꽃은 작은 바람에도 잘게 부서졌다. 흰 동강할미꽃이 생을 다하던 그 무렵 동강고랭이도 멋있게 휘날리던 수염을 다 떨구고는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봄을 맞은 동강에는 새로운 생명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흰 동강할미꽃과 동강고랭이는 사랑은커녕 둘이서 뜨거운 눈길 한 번 주고받지 못한 채 그렇게 죽어갔다. 동강이 사람으로 넘쳐나던 봄날 오후였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겨울도 갔다. 다시 동강할미꽃이 피어나는 봄이 돌아왔을 때 동강에선 작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의 명칭은「동강할미꽃과 동강고랭이의 영혼결혼식」이었다.
행사를 만든 이는 흰 동강할미꽃을 수습한 사내였다. 사내는 올해도 동강할미꽃이 피기 시작할 즈음 자신의 사진들을 동강에 전시했다. 이번엔 1년 전 채취꾼에 의해 죽어간 흰 동강할미꽃 사진도 있었다. 사내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 사진을 크게 제작해 그 밑에다 흰 동강할미꽃이 죽어간 이유를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행사가 시작되자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사내는 동강할미꽃과 동강고랭이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하게 된 이유를 말했다.
“동강할미꽃은 지구상에서 동강에만 서식하는 꽃입니다. 그렇게 귀한 꽃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꺾거나 채취하여 우리의 소중한 동강할미꽃을 죽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봄 흰 동강할미꽃을 채취하던 사람이 뼝대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일은 그날 흰 동강할미꽃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흰 동강할미꽃은 동강할미꽃 중에서도 가장 귀한 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꽃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동강고랭이는 또 어떻습니까. 멋진 수염을 휘날리며 동강을 굽어보고 있는 동강고랭이야말로 동강의 수호신입니다. 때문에 저는 흰 동강할미꽃의 죽음을 위로하고 소중히 여기자는 생각으로 동강에 있는 동강할아범인 동강고랭이와 동강할멈인 동강할미꽃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사내는 말을 마치고 검은 천으로 둘러싸인 대형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왔다.
누구의 도움 없이 사내 혼자 준비한 무대였다. 사내가 준비한 영혼결혼식은 인형극이었다. 상자 안으로 들어간 사내는 헝겊으로 만든 동강고랭이와 흰 동강할미꽃 인형을 들고 인형극을 하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 강원도 정선에 동강이라는 아름다운 강이 있습니다. 그 동강엔 동강고랭이와 동강할미꽃이 살고 있었는데요, 사람들은 동강고랭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긴 수염을 하고 있어 동강할아범이라 불렀고, 동강할미꽃은 새침하면서도 귀여운 데다 그 모습이 너무도 고와서 동강할멈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둘은 동강의 뼝대에서 나란히 살았는데, 동강고랭이는 봄에 수염이 돋아나기 시작해 그 다음해 봄까지 멋진 수염을 뽐내며 살았고, 동강할미꽃은 봄에 피었다 보름 정도면 시들어 버리는 봄꽃이었습니다. 둘은 운명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요, 정작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며칠 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동강할미꽃이 동강고랭이의 마음을 많이도 애태웠거든요. 그렇게 둘은 티격태격하며 서로의 사랑을 키워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둘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이었습니다. 동강고랭이도 동강할미꽃이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행복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었습니다. 얼굴에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동강에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동강에서 가장 귀한 흰 동강할미꽃을 채취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암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온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강할미꽃을 모종삽으로 푹, 퍼서는 준비해온 통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욕심 가득한 사람은 하늘의 벌을 받았는지 그 순간 밟고 있던 돌부리가 무너져 내리면서 아래로 추락을 했습니다. 물론 흰 동강할미꽃도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흰 동강할미꽃을 몰래 캐 가려던 그 사람은 그날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다시피 했답니다.
귀하게 여겨야 할 동강할미꽃을 채취하려다 벌을 받은 거였습니다. 뿌리가 잘려나간 흰 동강할미꽃은 시름시름 앓다가 곧 죽었습니다. 동강할미꽃을 만나기 위해 1년이나 기다려온 동강고랭이는 눈물만 흘렸습니다…….”
사내는 준비한 글과 대사를 낭독하며 인형극을 계속 이어갔다. 인형극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흥미를 느꼈는지 작고도 볼품없는 인형극 공연을 지켜보기 위해 상자 가까이로 한발 한발 다가섰다.
드디어 사내의 두 손에 들려진 동강고랭이와 흰 동강할미꽃이 죽어서나마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동강대왕님과 모든 동강신께 고합니다. 오늘 따뜻한 봄날 동강에 모인 여러분들께도 고합니다. 우리가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동강할미꽃과 동강고랭이를 모든 분들이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영혼결혼식을 시켜 주고자 합니다.
에, 신부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동강할멈이 되겠고, 신랑은 신선이자 동강의 수호신인 동강할아범이 되겠습니다. 비록 영혼결혼식이라고 하지만 고랭이와 할미꽃이 엄연히 부부가 되는 관계로 여기에 모이신 분들께서는 아낌없는 축하와 축복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사내의 말에 인형극을 지켜보던 관광객들에게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그렇게 영혼결혼식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던 동강고랭이와 동강할미꽃들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냈다.
“저 사람 참 멋지다. 저런 분만 있다면 우리가 어이없게 죽지 않을 텐데.”
“그러게 말야.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어. 그럼 우리가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울 텐데.”
동강할미꽃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영혼결혼식이 끝나자 동강비오리가 축하 비행을 했고, 작은 새떼들은 아찔한 곡예비행으로 동강고랭이와 동강할미꽃의 결혼을 축하했다. 그와 동시에 동강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합창이라도 하는 듯 축가를 불렀다.
동강에선 사랑하세요~?
동강에선 사랑하세요~?
동강에선 사랑하세요~?
동강할멈과 동강할아범처럼 아름답고 멋진 사랑을 하세요~?
'여행지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신들의 정원~조선 왕릉들... (0) | 2014.09.18 |
---|---|
[스크랩] 산라의 마지막 왕자-마의 태자 [麻衣太子] (0) | 2014.09.17 |
한여름밤의 야간 경마공원 산책및 맛집멋집 백운호수 둘러보기~ (0) | 2014.08.16 |
인제 아침거리 2014,7,19,토) (0) | 2014.08.16 |
낙동정맥 트레일,승부역에서 분천역까지 (0) | 2014.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