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0:1-5절 “내가 진신로 진실로 너희게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한복음 10장은 암호문서와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처음에 보면 어렴풋이 그 뜻을 알 것도 같은데 보면 볼수록 더 어렵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는 문체는 어렵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나아가는 외길이 쭉 나 있어
내용이 간략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쉬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한 두 구절을 뽑아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 사용하기는 쉽지만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려면 높은 산이 쉽게 그 정상의 자리를
내 주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 양의 우리, 양의 문,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 문지기,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등을 보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당시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로드맵을 제시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구원은 소급으로 적용이 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에
포함이 된 우리는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그의 대속의 은총에 참예하므로 그 분의 승리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받는 것(receive)이지,
성취하는 것(achieve)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구약을 통해 하나님이 미리 예언하신 구원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려오고,
우리 스스로 그 말씀에 끌려 다가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 안에서 눈과 귀가 열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보고
그 분이 이루신 업적을 믿음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가 목자가 되고 자신은 그 분의 양이 되는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이와 같은 구원은 자신이 하나씩 이루어 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또 듣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스르르 당겨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자신의 노력보다 위치와 소속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담 안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고(엡2:1) 우리를 그 분 안에서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마귀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대상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나를 위해서 하신일과 앞으로 하실 일을 함께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의 우리라고 한다면 분명히 어떤 영적인 처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임금이 마귀인데 우리 주님께서
그 마귀의 수중 안에 있는 땅에 양의 우리를 건설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다시 사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구속의 날이 다 차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마지막 흰 보좌 심판을 위해 틀림없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나라로,
다른 책들에 녹명된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
곧 둘 째 사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문제가 딱 하나 있습니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왕인 사단의 영역인 육신의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피를 흘리면서
달려 있는 줄로 여깁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자신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음을 그들은 굳게 믿습니다.
문제는 딱 하나 그들의 위치가 십자가의 앞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성숙되지 않습니다.
애굽에서는 나왔지만 먹을 양식이 없고 물이 없고
길이 없는 광야를 빙빙 도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분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십자가 앞에 서 있습니까? 십자가를 건너 가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얼마 전에 제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우리는 십자가를 건너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야 우리가 받은 은혜 곧 복음의 말씀이
화합이 됩니다’라고 했더니 오랫동안 그 말을 씹고 되씹고 하는 분을 봤습니다. 아마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을겁니다.
보혈을 지나 십자가를 지나 하나님께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그 분은 지금도 주 예수의 피를 끌어안고 있든지,
그 분의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양의 우리가 선지피를 뚝뚝
흘리신 십자가 밑일까요?
물론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 앞에 엎드린 경험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았음을 처절하게 깨닫고,
그 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돌이키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 피에만 머물러 있고
저주스런 십자가의 공로만 의식하도록 우리를 언제나 그 자리에
앉혀 놓았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히9장은 피 흘려 죄를 사하심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히9:14)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시고 죄와 사망 안에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와 생명으로 옮기신 목적 또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엡2장)
그렇다면 주께서 건설하신 양의 우리는 결코 우리 육신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 건너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이 양의 문이며
양의 목자라 말씀하시고 ‘자신의 목숨을 버린 후에 다시 찾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비로소 아! 하고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신기한 능력으로 자신들을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권세 아래에서 양의 우리로 옮겨 앉은 사실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의 세례 그리고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담다하게 외치게 된 것입니다(행2:38)
요한복음식으로 말한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 안에서 그 분과 하나가 된 사실을 받아들여라’는 말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동참한다는 맹세와 선언입니다.
결혼의 성혼선언문과 같습니다. 또 신랑을 따라 가겠다는 신부의 맹세입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접고 신랑의 인생 곧 그의 목숨에 자신의
목숨을 편입시키는 의식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 되셨으며 선한 목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맹세는 자명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 양들을 구속했고, 이미 당신의 나라로 옮겨
영원한 사랑의 나라를 이룩하시고 그 양들을 영생으로 부르신다는
선전포스터가 동네방네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을 따라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양들을 모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영생의 문을 여신 그리스도가
그 분의 양무리의 우리가 되심을 믿고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