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삼상1:9절)
사무엘은 ‘하나님을 듣는다’는 뜻이다. 사무엘상은 사울의 이야기로 보고 사무엘하는 다윗의 이야기로 보면 된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무엘 선지자가 있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지내기도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백성들의 여론을 의식하는 요즘 같으면 영적인 포퓰리즘의 지도자의 전형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왕이었고 법궤 앞에서 왕의 체면을 잊고 춤을 추기도 하고, 많은 사람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참회하는 신실한 지도자의 예표의 사람이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없는 세습된 제사장이다. 그는 자신의 업무파악도 제대로 안 된 제사장이다. 그 증거가 한나는 기도하러 일어났으나 엘리는 성전 문설주에 있는 그 의자에 눌러 앉아 있다. 의자는 성전기구가 아니다. 제사장이 일하는 성소에는 의자가 없다. 그럼에도 엘리는 자신을 위해 의자를 준비해 놓고, 성소 밖에 앉아 있다. 끝내 그는 그 의자에 앉아 있다가 두 아들의 전사 소식의 급보를 듣고 늙고 살찐 몸이 자빠져 그만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는 말씀과 기도가 없는 제사장이다. 한나가 깊이 기도할 때에 술 취했다고 나무랬다.
자기 아들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물을 가로채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른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을 자신들의 먹 거리로 삼아도,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여인들을 건드려도 사람들의 소문이 좋지 않다고 나무라는 정도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을 책망해도 돌이킬 줄 모른다. 왜 말씀이 없으니 회개의 기준이 없다.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회복할 수 있는 회개를 드릴 수 없다. 이건 무서운 저주다. 홉니와 비느하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지 모른다.
법궤의 영광과 능력에 대한 표적은 알고 그 법궤를 블레셋 전쟁에 들이댄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분께 법도와 규례대로 제사 곧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할 법궤를 자신의 육신의 전쟁에 끌고나갔다. 성경을 자동차에 싣고 다니고 십자가를 무슨 부적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 엘리는 이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 눈이 어둡고 살이 쪄서 움직임이 둔하고, 오직 사람들의 말만 들을 뿐이다. 결국 법궤는 블레셋에 빼앗기고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의미로 비느하스의 아들의 이름이 ‘이가봇’이 되고 말았다. 이로 보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그 분의 뜻 안에서 날마다 자신을 살피며 안락한 의자에서 일어나 성소에 들어가서 성령의 불을 지피고,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먹으며 향을 짜듯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 드림을 결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