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절)
20년 이상을 설교했지만 ‘사랑하라’는 것과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고 헌금하라는 제목을 택해 본적이 없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내용들의 행함은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어느 수준으로 성숙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표현이며, 그 다음은 ‘안다이 박사’들이 남에게 명분만 내세우고 흉내만 내는 모습이 싫어서이다. 말과 혀로만 성령을 좇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공짜이기 때문에 너무 쉽다. 잠시 자신을 속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그 형제' 요일3:14-15)를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고역이다. 한다고 해도 그건 철저한 자기애이다. 거의 말과 혀로 그치고 손이 지갑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름이 나는 곳이나 직분의 체면이 걸리면 각자의 성격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갑이 든 손을 높이 쳐들고 앞으로 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자들을 우쭐대게 해서 돈을 뜯고, 없는 사람들은 자극을 줘서 오기를 발동시켜 돈을 내게 하는 기술을 익혔다. 다분히 심리적인 술수이다.
그런데 이런 불법 때문에 참 사랑이 말과 혀로만 바뀌어 간다. ‘사랑한다,기도하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는 등의 립 서비스로 그치고 만다. 어제는 한 장애인이 절뚝거리며 화장지 몇 롤을 끌고 팔러 다니는 모습을 보고 사 주고 싶은 마음에 값을 물으니 내가 생각하는 값과 차이가 난다. 시세를 모르고 마음만 앞선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보니 1,000원이 모자란다. 미안하다고 돌아서긴 했지만 한 동안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이토록 사랑은 동기윤리도 중요하지만 행할 수 있는 목적윤리는 더욱 중요하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요삼1:3)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리 안에서 수고하는 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사랑하므로 그 수고에 함께하는 것이다(요삼1:8) 물론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요한은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라(요삼1:2)고 간구한다.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팔아 선교사를 돕고, 오랜 기간 동안 선교를 위해 우선 지출을 하다 보니 정작 내 아이는 등록하지 못해 대학졸업이 늦어졌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는 손을 크게 내밀지만 나와 가족을 위해서는 구두쇠 소리를 듣는다.
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내가 여유가 많은 줄 안다. 그러나 실상은 물질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로 인해 구차한 일을 당하는 것은 내게는 밥 먹는 일과 같다. 그렇지만 탐심으로 재물을 쌓으려는 마음은 없지만 내일의 염려 때문에 눈 앞에 있는 가난한 형제를 향한 나의 손이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연약함에 아직 놓여있을 때가 많다. 그리고 말과 혀로 때우려는 비겁한 나를 본다. 그래서 만약 주께서 ‘네가 나를 진실로 사랑하느냐?’ 물으신다면 나는 아직 ‘주께서 아십니다’고 대답한 베드로를 넘어서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