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 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히4:14절)
신앙의 기초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와 그 분이 하신 일을 굳게 붙잡는 것이다. 아니 확실하게 믿어질 만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딴 길은 없다. 이것이 큰 구원이다(히2:3) 태초 안에서 말씀하시던 그 분이 육신으로 오셔서 죄와 사망을 안고 마귀의 수중에 있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 그리고 우리안에 임마누엘 하셔서 우리를 붙드시고 도우신다(히2장)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오셨다가 다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파악하도록 힘써야 한다(히3:1)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분의 임재에 대한 약속을 견고하게 잡으면 그 분에게 참예하는 사람이 된다(히3:14) 그 분께 붙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것을 성경은 승천이라고 한다. 그 분에게 참예 곧 동참, 하나 되었다는 말은 그 분의 승천에 편승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히3:1)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수준은 예수그리스도를 평면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 그 분이 하신 일을 인정하는 사람, 그 분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그 분께 자신을 드리는 사람,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 보는 눈으로 다시 그 분과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이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듣긴 하는데 그것이 자신의 경건과 영성에 유익이 되지 못하고 그저 아는 것으로 그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이 승천의 도리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므로 하늘 문을 여시고, 다시 승천하시므로 하늘 길을 내셨다(요14:6) 그리고 주님은 그 길을 통해 자신을 따라 아버지께 오라고 하신다. 말씀이 이루어짐 곧 믿음의 화합은 이 길을 따라 하나님은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길 외엔 없다(히4:16) 그래봤자 스스로의 훈련과 연습일 뿐이다. 본성의 변화는 아니다. 본성의 변화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 곧 하나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요15장)
그러나 사람들은 이 길을 가기 싫어한다. 아니 마귀가 이 길을 가로막는다. '네 스스로 말씀을 따라 떳떳하게 될 수 있다'고 육체의 연습을 꼬드긴다. 지금의 기독교의 한심한 영적인 상태와 경건의 열매가 거의 가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열매가 저절로 달린 것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가지를 꺾어다가 달아맨 것 같이 엉성한 원인이 바로 이 무지와 게으름이다. 한 쪽은 승천의 도리를 모르고, 다른 한 쪽은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철저히 육신을 포기하는 일에 게으름을 피운다.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주의 긍휼과 자비로운 은혜를 얻어 믿음의 화합을 이루기 위해선 승천의 도리를 굳게 붙잡고 혈과 육을 버리고 영으로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는 일 외엔 결코 없다(히4장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