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절)
이 말씀만큼 자주 묵상할 말씀도 많지 않습니다. 운동에 있어서 차려 자세라고 할 만큼 신앙에 있어서 기분적인 발상입니다. 영적인 세계의 시발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은총과 자신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 속에 들어가는 준비운동입니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의 통로인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계시된 지식이 없이 막무가내로 동양의 신비주의 비슷한 방법으로 며칠 갈고 닦은 영으로 하나님께 밀고 들어가는 관상의 기도 같은 것이 기도의 교과서로 등장하는 시대를 바라보며 측은한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는 지식, 곧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믿음은 아무나의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합니다. 얼마 전에 부인이 말다툼 끝에 친구와 같이 현실을 도피하듯 기도원으로 들어가서 일주일간 기도 한 뒤에 그만 정신분열이 와서 그 일로 하던 장사가 망하고 난 뒤에 외국에 와서 어렵게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그 기억으로 한국교회를 평가합니다. 안 그래도 교회를 가기 싫었는데 그 열광적인 신자인 아내가 기도하다가 미쳐 버려 사단이 쫓아온다고 고함을 쳐대는 몹쓸 병에 결려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같이 들어가 한 달을 간호한 다음 간신히 구해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이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에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대뜸 한 말이 ‘당신은 타고난 운명의 짐에 눌려 낑낑대고 있습니다. 그 운명의 덫을 벗어버려야 인생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담 안에 잘 못 태어난 운명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운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재의식에 숨겨진 조상의 나쁜 얼이 결코 놓아주지 않습니다. 본 어게인(born again)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만히 두고 환경과 사정을 좋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줄 아는 어린 신앙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은 그리스도와 죽었으니 이제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로 살게 하신 것 곧 운명을 바꿔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5:14-15)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타고난 운명의 자화상, 지저분한 기억과 상념들이 생각과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여러 가지 정신적인 부작용이 일어나 잠시도 안식이 없습니다. 바로 육신의 생각인 사망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새로운 피조물은 이제 타고난 육신의 운명의 덫에 치어 낑낑대는 옛 사람이 아니라 육신은 십자가에 걸고 이제 영으로 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절실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잊지 마십시오.